2022.12.21 (수)

2022년의 마지막 문지레터를 보내드려요. 여러분은 연말을 어떤 책과 함께 보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12/21 오늘 저녁에는 문학과지성사 인스타그램에서 올해의 마지막 문지라이브가 예정되어 있어요. 이우성, 이기리 시인과 함께하는 문지라이브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 안녕하세요, 문학과지성사 독자 여러분. 부쩍 추워진 겨울 잘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이번에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라는 시집을 낸 시인 이기리라고 합니다.

❄️ 2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내셨어요. 두번째 시집을 묶는 일은 첫 시집에 비해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드셨나요?

📷 첫번째 시집을 낼 땐 정신이 없었어요. 원고를 묶어 보냈더니 두 달 만에 시집을 내야 했었죠. 세상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이 부분에서 상당한 압박감을 받았던 것 같아요. 욕심이 컸죠. 반면 이번 시집을 묶는 일은 조금 달랐어요. 압박과 욕심이 있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시달리는 정도까진 아니었죠. 대신 이전보다 더 편한 발성으로 시를 쓰고 싶었어요. 진짜 내가 자연스럽게 뱉는 목소리를 한번 들어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이번 시집은 어쩌면 언어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전작보다 느슨하다는 느낌이 제겐 있어요. 물론 저는 지금 그 느낌이 무척 좋습니다. 자연스럽고요, 무엇보다 자유로워 보여요.

❄️ 시를 쓰실 때 시인님만의 루틴이 궁금해요
📷 옛날에는 하루하루 꾸준히 쓰는 작업을 좋아했어요.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도 썼죠. 독기를 갖고 시를 쓰던 시절이었죠. 제가 성장할 수 있는 데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결코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었죠. 시를 쓰는데 죽기 살기로 쓸 필요는 없어요. 시를 안 쓰는 시간도 결국 시를 쓰는 시간으로 돌아오거든요. 그래서 현재 저에게는 루틴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삶을 충실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서 늘 감각의 안테나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세상과 통신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거죠. 그러다 보면 쓰고 싶은 게 생깁니다. 휴대폰을 열어 격렬하게 메모를 해요. 메모 그 자체가 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나만의 생각과 시선을 모아두었다가 어느 날 시로 씁니다. 간단합니다. 느낀 것을 잘 모으고 시로 쓰기. 아, 가장 중요한 걸 빠뜨렸는데, 저는 시를 쓸 때만큼은 절대 밤에 쓰지 않습니다. 낮을 좋아해요.

❄️ 시인님이 좋아하는 겨울 풍경은 어떤 것인가요? 자주 보고 싶은 풍경이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 풍경도 궁금합니다
📷 제 방에 있는 창문 너머에 바로 나무가 있는데요. 간밤에 내린 눈 때문에 나뭇가지에 눈이 한가득 쌓여 있으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인간의 관점으로는 나뭇가지 위가 매우 위태로워 보이는데 눈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테니까요. 얼마간 포근히 나뭇가지 위에서 쉬고 있는 눈을 보고 있는데 마침 거리에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다면, 더더욱 이 세상에 대한 안정감을 느끼게 돼요. 자주 보고 싶은 풍경은 잘 모르겠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풍경을 말하고 싶은데요. 바로 저희 집 앞 풍경입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하고 지루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풍경이겠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요. 내가 이 풍경과 함께 살았다고. 매번 같아 보여도, 매 순간 다른 느낌으로 생동하는 집 앞 거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꽃과 향기, 벤치 위 모든 것.

이기리 시인 PICK! 📖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 이번 시집에서 문지레터 구독자분들께 이 시를 소개해주신 이유는?

📷 시집을 닫는 시 「다시는 이제부터」를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네요.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는 아니지만 제가 기차를 좋아하기 때문인데요. 저는 차창 너머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즐깁니다. 특히 기차처럼 지면과 맞닿은 채 보여주는 풍경만큼 즐거운 것도 없어 보입니다. 누굴 만나려는 의도 없이 기차를 타기도 합니다. 떠나는 길이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이기도 하겠죠.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상한 생각이지만 제가 문득 ‘다시’라는 부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어떤 반복의 굴레 속에서 다시, 다시, 다시라고 말하게 되는 발화 그 자체였던 걸까요. 그것이 기다림과 부딪치면서 어떤 스파크를 느꼈던 것 같아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다시’ 같다. 무언가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다고 말이죠. 그리고 만약 ‘다시’라는 주체가 된다면, 뒤에 주격조사를 붙일 수도 있겠죠. 다시가, 다시는, 이렇게요. 그런데 우리는 “다시는”이라고 말하는 용례를 이미 알고 있죠. “다시는” 뒤엔 보통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죠. 하지만 ‘다시’라는 주체는 늘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갈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적 부딪침을 홀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느꼈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타면 어김없이 눈앞에 나타나는 풍경들. 보고 또 봐도 늘 처음 보는 듯하다고 이내 홀리게 되는 것. 이 시를 통해 함께 저마다의 기차를 탔으면 해요.

❄️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를 읽으며 함께 들을 노래를 추천한다면?
📷 이번 제 시집에는 유독 가을이 많이 나옵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것도 아닌데도요. 언제부턴가 저는 비가 오거나 날씨가 부쩍 쌀쌀해질 즈음이면 꼭 이 노래를 듣습니다. 존 바티스트(Jon Batiste)의 「The Very Thought Of You」라는 노래예요. 재즈곡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듣다 보면 이상하게 먹먹해져요. 제 시집과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즐겨주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

❄️ 시인님의 책장에서 문지레터 구독자 분들과 함께 읽고 싶은 문학과지성사의 책을 꼽자면?
📷 보통 책을 나눌 때 시나 소설을 주로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는 한번 시와 소설은 잠시 옆으로 두고 다른 분야의 책들을 나누어볼게요. 질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은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읽었던 책이에요. 피로와 소진이라는 개념을 구분하면서 베케트의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근거들을 제시하는데 에세이적 감각과 호흡까지 갖추고 있어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첫인상과 다르게 의외로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계급 정체성과 성 정체성이 동시다발적으로 충돌해요. 랭스는 저자에게 아주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고요. 종종 타국에 사는 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가 많아요. 이 책은 분명 개인의 주체성이나 정체성을 사유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거예요. 마지막으로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는 여러모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요청되어야 하는 내용으로 가득해요. 이 책은 개인적으로 독서 이후에 반드시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신다면, 다 읽고 난 뒤,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해요.

소중한 것이 머물던 시간 속 눅눅한 장면을 꺼내
볕에 말리며 다시 사랑하는 시

구독자 여러분의 서재를 소개하는 💌문지레터의 특별 코너! 📚독자의 서재는 독자 여러분이 평소 좋아하는 문학과지성사의 책을 직접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애정하는 ✨미리 님의 서재를 소개할게요.

✨ 안녕하세요. 저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차미리입니다. 코로나 시작 즈음부터 3년째 독서모임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어요.

📚 평소 좋아하는 문학과지성사의 책, 최애 best 3를 꼽자면요?

✨ 제가 좋아하는 책을 꼽아봤더니 모두 문학과지성 시인선이에요. 그중에서도 박준 시인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유희경 시인의 『오늘 아침 단어』 그리고 이병률 시인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렇게 3권이 좋아하는 문학과지성사의 책이네요.

📚 시집을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아침 단어』, 『바다는 잘 있습니다』를 최애로 꼽아주신 이유가 궁금해요.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박준 시인의 시집이에요. 시집을 읽다 보면 서정적이고 편안한 슬픔, 울음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단어』 역시 제가 좋아하는 유희경 시인의 시집인데요.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딘가 외롭고 무언가 기다리는 화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부분이 좋았어요. 마지막으로 이병률 시인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뗄 수 없는 시집이에요. 어쩐지 외롭고 찬란하고 아름답고 슬픈 것들이 모여있는 책입니다.

채석장 시리즈의 열 번째 책!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장-뤽 고다르의 대화를 담은 『뒤라스x고다르 대화』를 소개합니다. 1941년 생인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알랭 레네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 작업을 계기로 직접 여러 편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해요. 1930년 생인 영화감독 고다르는 영화평론가로 이력을 시작해 자신의 초창기 영화들로부터 문학, 말과 특별한 끈을 유지해왔어요. 어떤 의미에서 단독적이고 고독한 길을 걸었던 두 사람, 뒤라스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버릇없이 자란” “왕의 일족”이자 “무뢰한”인 두 사람은, 대화 내내 어긋나고, 오해하고, 충돌하다가, 아주 드문 순간에만 일치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불일치와 오해가 그들 대화의 숨겨진 동력이 되어주었고, 그 속에서 그들이 맺은 역설적인 동맹을 살펴볼 수 있어요. 『뒤라스x고다르 대화』에 실린 두 사람의 대화는 언어와 이미지에 대한 두 사람의 깊은 성찰을 담은 기록임과 동시에, 한 세기에 관한 가장 강력한 증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