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7 (수)

🦉 5월, 시, 이사, 커피 혹은 약간의 차, 백팩에는 여러 권의 책, 반쯤 적힌 노트, 연필 한 자루, 송화가루, 물걸레질, 어렵다는 말, 살뜰히, 걸음들, 웃음소리들, 밤에 더 또렷이 보이는 비행기들, 수풀처럼 우리가 자랄 때, 2행 공백, 떠나왔고, 그들은 그들의 습관을 그들과 함께 가지고 왔어요, 부엌과 붙여쓰기와 통로들, 그를 덮은 것이 하나도 없는 몸으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띄어쓰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시작하기로 해요,

🎤 두번째 시집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 출간을 축하드려요. 출간하신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언어와 종이의 묶음으로 된 어떤 산책, 일종의 배회인, 작고 얇고 평편한 부피를 지닌, 요철이 많은 표면, 가장 사적이며 가장 비개인적인 장소로서의, 언어와 종이의 묶음으로 된 어떤 산책, 일종의 배회인, 배회를 위하여 하염없이 열려 있는, 그리하여 느낌을 지나, 느낌으로 희미하게 연결되는, 이라고 나는 소감인 것을 적습니다.

🎤 시집을 준비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혹은 가슴이 뛰는 순간은 언제이셨나요?

🦉나는 살아 있어요, 매 순간 나의 가슴이 뛰고 있어요. 나는 죽어 있어요, 매 순간 기억을 잃어가고 있어요. 나의 작은 배회 속에서 거듭해서 죽다가 거듭해서 살다가 삶을 모르는 기쁜 젖은 얼굴로 걸어 나오는 나는.

🎤 시는 읽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남을 수 있는 장르인 것 같아요. 이 시집이 어떠한 분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닿았으면 한다는 작가님만의 바람이 있으신가요?

🦉너는 너의 속도를 발명한다, 폭풍우의 지나감처럼, 5월이 흔드는 잎사귀들처럼, 늪의 단조로움과 고요함처럼, 너는 너의 걸음걸이로, 너의 멈춤과 엎드림으로, 너의 지느러미와 불쑥 돋아나는 낯선 손으로, 이 공간을 함부로, 풀썩거림으로 지나가다오. 너의 얼굴이 그림자처럼 뚝뚝 떨어져 책장을 마주볼 때. 사이렌이 속삭이는 귓속말처럼, 네가 듣게되는 너의 목소리처럼.

심지아 작가 PICK! 📖 「장소의 어림」 전문

아이들이 슬픔을 베껴놓았다

그러자

다른 것이 되었다

                                *

세 개의 문장이 놓이는 간격은

멀다

                                *

달게 조려지고 있다

                                *

어린 시절에서는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아진

당과를 꺼낼 수 있다

                                *

오후의 선반에

사탕과 과자를 진열하고

고운 체에 여름의 긴 그림자를 거르고

                                *

의자가 보살피는 침묵은

시간을 부풀게 한다

                                *

사람이 들어온다

사람은 단수일 때도 복수로 읽힌다

                                *

무릎을 낮춰 널리 분포하는

선반과 눈을 맞추고

팔을 뻗어 달게 조려진 것을 고른다

                                *

입속에

사라지는 맛을

                                *

부드러운 살이어서

입은

침묵을 감싼다

                                *

어둠의 것도

사물의 것도

사람의 것도,

아닌 

🎤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에서 이 부분을 소개해주신 이유는?

🦉어른이 된 우리는, 침묵과 언어, 그 어디 즈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해요. 5월은 침묵 위로도 5월의 빛을 드리우고, 5월은 우리 안의 어린이가 꺼내지기 좋은 시간인 것 같아요. 우리 안에서 어린이가 문득 부드럽게 달려 나오는 시간 같기도 해요, 무릎은 멍들었고, 5월의 빛은. 당신의 어린이는 어떤 시간을 살았나요, 당신의 침묵과 언어 그 사이 어디 즈음에 남아 있나요.

🎤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를 읽으며 함께 들을 노래를 추천한다면?

🦉 Alessio Bax의 「Lullabies for Mila」

우리에게도 자장가가 필요해요. 자주 깨지는 우리의 잠을 덮을, 네가 벗어놓은 너의 흐린 그림자 위로 아주 가벼운 무게로 펼쳐질 음악이, 음악과 우리가 한 마디쯤, 두 마디쯤…… 포개질 때, 음악에 대하여 우리가 일종의 자장가처럼, 잠든 아이의 벌어진 입술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숨결처럼, 우리가 문득 하염없이 잠이 들 때.

🎤 작가님의 책장에서 문지레터 구독자 분들과 함께 읽고 싶은 문학과지성사의 책을 꼽자면?

🦉 읽기를 마친 책이 아닌, 나의 지금이 꺼내들게 한 책 그리하여 나의 지금이 읽고 있는 책, 그것은 나의 떠남, 모국어로부터 떠나 있게 되는 나의 상태, 나 그리고 이제 갓 말을 배우는 아주 작은 아이라는 최소의 언어 공동체만을 지닌 채 우리가 우리의 모국어로부터 떠나 있게 되는 나의 상태, 그것의 위태로움이 펼쳐 들게 한 책 세 권을 이곳에 놓습니다.

허수경의 언어는 속수무책의 시간에서 밀려옵니다. 그는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겪으며 아득하고도 선명한 음성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지요. 우리는 언뜻 우리에게 멀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우리 내부에 밀착한 그 속수무책의 시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도무지 그의 언어를 아프지 않게 읽을 도리가 내게는 없군요.

김혜순, 『여성짐승아시아하기』, 2019

김혜순의 산문은 그것을 읽는 이를 "세상의 수평적 중심, 세상의 수직적 극한까지 데리고" 가려 합니다. 잠재적인 것들이 분포한 한없이 낮은 몸의 실재를 만나게 합니다. 그의 산문을 읽으며 나는 나의 부재로부터 나의 심장의 분열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을 더 잘 듣게 됩니다.

오션 브엉, 『총상 입은 밤하늘』, 안톤 허 옮김, 2022

어떤 폭력은 어떻게 기록되는가. 그것은 밤하늘을 관통한 뚫린 구멍 같다, 총알이 뚫고 지나가 관통된 아물지 않는 구멍 같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둘러싼 밤하늘의 광막한 부드러움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사랑하는, 당신의 몸처럼. 그의 시는 제국의 언어인 영어로 쓰였고, 그의 시는 총상으로 뚫린 베트남어의 붉은 피로 적셔 있다. 그의 시가 한국어로 도착했다는 것, '혀에서 난 칼날'이 혀의 부드러움으로 변하면서 적히는 그의 시를 우리는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 안에서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에디터의 책편지

그는 웃음의 대명사로 불렸다 잘 웃어서였을까, 잘 웃겨서였을까 어느 순간, 그는 웃음과 한 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서글서글한 얼굴의 모공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흘러나올 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번 터져 나온 웃음은 삽시간에 좌중을 압도해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함께 웃다 보면 때가 아니었다 장소가 빗나갔다 경우에 맞지 않았다 장례식장이 일순 축제 현장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는 웃음의 대명사로 입장했지만, 번번이 민폐의 대명사로 퇴장했다

사람은 명사다 너는 대명사다
당연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큰 명사가 아니라 그저 대신하는 명사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질투하고 질타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웃는다는 이유로, 똥오줌 못 가리고 웃는다는 이유로 그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아무 데서나 물색없이 웃는 이를 발견하면 사람들은 즉각 그를 소환했다 평소와 같이 그가 웃을 때면 이런 말이 날아들었다 좋아? 살 만해? 만족스러워? 그가 웃길 때면 이런 말이 메다꽂혔다 우스워? 웃음이 나? 만족스러워? 평소와 다르게 물속에서도 만족은 녹지 않았다 불 속에서도 만족은 타지 않았다 오줌 앞에서도 똥 앞에서도 만족은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사람은 고유명사로 태어나 보통명사로 살아간다
제 이름을 대신하는 명사로 분扮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게 분해서 허허 웃어버렸다

그의 이름은 눈치 없이 실실 웃는 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햇반처럼, 대일밴드처럼, 초코파이처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서울처럼, 지프처럼, 스크루지처럼 친하지 않아도 친근하게 들렸다 갈 수 없어도, 가지거나 만나지 못
해도 섭섭지 않았다 그저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되었다 명사는 대체되지 않았기에 그의 이름은 하염없이 낡아만 갔다 그는 보통명사에서 추상명사가 되었다 사랑처럼 흔하고 희망처럼 귀하지만 삶처럼 끝끝내 막연했다 없음의 대명사처럼

물불 가리지 않았기에 그는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똥오줌을 못 가렸기에 아기처럼 자연히 의연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던 순간이 딱 한 번 있었다 그때 그는 웃음을 이해했다고 믿었다 웃느라 한 말에 감히 초상이 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p.97